안테 파벨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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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테 파벨리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태어난 크로아티아 정치인으로, 변호사이자 우스타샤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29년 알렉산다르 1세의 독재 선포 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우스타샤를 결성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수립하고, '포글라브니크'로서 통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니족 등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을 자행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59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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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 파벨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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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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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 포글라브니크 |
이름 | 안테 파벨리치 |
로마자 표기 | Ante Pavelić |
IPA | /ǎːnte pǎʋelit͡ɕ/ |
출생일 | 1889년 7월 14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브라디나 |
사망일 | 1959년 12월 28일 (향년 70세) |
사망 원인 | 총상 합병증 |
사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안장지 | 마드리드, 산 이시드로 공동묘지 |
국적 | 크로아티아 |
정당 | 우스타샤 (1929년–1945년) |
기타 정당 | 권리당 (1910년–1929년) 크로아티아 국가당 (1950년)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 (1956년–1959년) |
출신 학교 | 자그레브 대학교 |
직업 | 정치인 |
전문 분야 |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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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임기 시작 | 1941년 4월 10일 |
임기 종료 | 1945년 5월 8일 |
군주 | 토미슬라브 2세 (1941년–1943년) |
총리 | 본인 (1941년–1943년) 니콜라 만디치 (1943년–1945년) |
전임 | (신설) |
후임 | (폐지) |
임기 시작 | 1941년 4월 16일 |
임기 종료 | 1943년 9월 2일 |
군주 | 토미슬라브 2세 |
전임 | (신설) |
후임 | 니콜라 만디치 |
임기 시작 | 1943년 1월 4일 |
임기 종료 | 1943년 9월 2일 |
총리 | 본인 |
전임 |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 |
후임 | 미로슬라브 나브라틸 |
임기 시작 | 1941년 4월 16일 |
임기 종료 | 1941년 6월 9일 |
군주 | 토미슬라브 2세 |
총리 | 본인 |
전임 | (신설) |
후임 | 믈라덴 로르코비치 |
임기 시작 | 1927년 9월 11일 |
임기 종료 | 1929년 1월 7일 |
군주 | 알렉산다르 1세 |
총리 | 벨리미르 부키체비치 (1927년–1928년) 안톤 코로셰치 (1928년–1929년) |
선거구 | 자그레브 |
임기 시작 | 1919년 |
임기 종료 | 1927년 |
2. 유년 시절 및 교육
안테 파벨리치는 1889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브라디나 마을에서 태어났다. 브라디나는 코니치 북쪽 이반 산 경사면에 위치하고 하자치에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의 부모는 리차 남부(현재의 크로아티아)에 위치한 크리비 푸트 마을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이주해 사라예보-메트코비치 철도 노선에서 일했다.[25]
1920년대 초, 파벨리치는 빈과 부다페스트에 있는 크로아티아인 망명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이후 그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1927년에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스코페에서 일으킨 테러 행위를 옹호했다. 파벨리치는 빈에서 이탈리아 정부와 비밀 관계를 맺었지만, 헝가리와는 외교 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그러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28][29]
1929년 알렉산다르 1세가 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파벨리치는 해외로 도주하였으며,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의 테러범이 소피아에서 조직한 반(反)세르비아 시위에 참가했다는 죄로 베오그라드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31] 그때 파벨리치는 극단주의 성향의 우스타샤를 조직하고 지하로 숨었다.
히틀러는 괴뢰 정권보다는 나치에 직접 통치받는 것을 선호했지만,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기구(UHRO)의 경우처럼 다른 선택이 없을 때는 괴뢰 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파벨리치는 1932년 우스타샤를 창설하고, 크로아티아의 민족 정체성과 가톨릭에 기반한 독립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우스타샤는 인종 청소와 영토 획득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보스니아와 달마티아 전체를 포함하는 국가를 구상했다.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우스타샤는 점차 인종을 강조하게 되었다.[34]
그의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야이체 외곽의 예제로 마을로 이주했고, 파벨리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인 ''마크타브''를 다녔다. 여기서 파벨리치는 무슬림 전통과 관련된 교훈을 배웠다.[26] 파벨리치는 부모와 함께 리카를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크로아티아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적 감각을 키웠다. 트라브니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권리당 지도자인 안테 스타르체비치와 그의 후계자인 요십 프랑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랐다.[26]
1905년 건강 문제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사라예보와 비셰그라드에서 철도 관련 일을 했다. 이후 형 요십의 고향인 자그레브에서 학업을 계속하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 초기에 순수 권리당과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의 장인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대령이었던 요십 프랑크가 설립한 학생 단체인 ''프랑코브치''에 가입했다.[25][26] 이후 센의 고전 김나지움에서 5학년 과정을 마쳤다. 건강 문제로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부제트 근처 이스트라에서 도로 공사 일을 했다. 1909년 카를로바츠에서 6학년 과정을, 센에서 7학년 과정을 마쳤다. 1910년 자그레브에서 졸업하고 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26] 1912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반인 슬라브코 쿠바지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26] 1914년 법학 학위를, 1915년 7월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권리당 대표인 알렉산다르 호르바트|Aleksandar Horvathr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고, 이후 자그레브에서 변호사가 되었다.[26]
3. 정치 활동 초기 (1919-1929)
자그레브 시 의원이었던 파벨리치는 1927년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안테 트룸비치와 함께 크로아티아 지역 명부에서 선출된 두 의원 중 한 명이었다.[30] 파벨리치는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당파 정부가 등장할 때까지 우익당의 당 서기 직을 맡았다. 1929년 알렉산다르 1세가 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파벨리치는 해외로 도주했고, 베오그라드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파벨리치는 극단주의 성향의 우스타샤를 조직하고 지하로 숨었다.
파벨리치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권리당에서 활동했다. 그는 지도자 호르바트의 직원 겸 친구로서, 호르바트가 부재 시 그의 임무를 대신하며 중요한 당 회의에 자주 참석했다. 1918년 파벨리치는 당 지도부와 사업 위원회에 합류했다. 1918년 12월 1일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 국가와 세르비아 왕국의 통일 이후, 권리당은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 왕을 반대하고 최고 국가 당국이 통일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공개 시위를 벌였다. 또한 당은 1919년 3월 프로그램에서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원한다고 밝혔으며, 이는 당 의장인 블라디미르 프레베그와 파벨리치가 서명했다.
1921년 자그레브 지방 선거에서 파벨리치는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을 대표하여 유고슬라비아 총리이자 인민 급진당의 멤버인 니콜라 파시치에게 접근하여, 크로아티아 농민당 (HSS)을 약화시키려 했다. 파벨리치는 권리당의 '프란코브치' 파벌의 일원이었다. 1921년 파벨리치를 포함한 권리당원 14명은 반유고슬라비아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파벨리치는 이후 재판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석방되었다.
1922년 8월 12일, 자그레브 성 마르코 교회에서 파벨리치는 마리아 로브렌체비치와 결혼했다. 그들은 딸 비슈냐와 미르야나, 아들 벨리미르, 세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는 어머니 쪽으로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 마틴 로브렌체비치는 권리당의 멤버이자 유명한 언론인이었다. 이후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변호사를 대표하는 전문 단체인 크로아티아 변호사 협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의회 연설에서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며 크로아티아 독립을 지지했다. 그는 크로아티아 권리당 청년들과 함께 활동했으며, '스타르체비치'와 '크바테르니크'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1927년 파벨리치는 당 부회장이 되었다.
1927년 6월, 파벨리치는 자그레브 주를 대표하여 파리에서 열린 유럽 도시 회의에 참석했다. 파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로마를 방문하여, 유고슬라비아 분할에 대한 협력을 제안하는 HSP 명의의 각서를 이탈리아 외무부에 제출했다. 크로아티아 독립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 각서는 크로아티아가 '이탈리아의 보호령'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각서는 또한 권리당이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간의 기존 영토 합의를 인정한다고 명시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합병한 이스트라, 리예카, 자다르 및 아드리아 해 섬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 이 지역에는 30만에서 40만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했다. 또한 각서는 코토르 만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달마티아 곶을 이탈리아에 양도하는 데 동의했으며, 미래의 크로아티아가 해군을 창설하지 않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크로아티아 블록의 가장 급진적인 정치인으로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문제"를 국제화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지속 불가능성을 강조할 기회를 모색했다. 1927년 12월, 파벨리치는 마케도니아 학생 4명을 스코페에서 변호했는데, 그들은 이반 미하일로프가 설립한 마케도니아 청년 비밀 혁명 조직에 소속된 혐의를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파벨리치는 법원이 그들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비난하며 자기 결정의 권리를 강조했다. 이 재판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1927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 의회 선거에서 크로아티아 블록의 일원으로 선출된 후 파벨리치는 니콜라 파시치와의 당의 연락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안테 트룸비치와 함께, 크로아티아 블록의 두 명의 선출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그는 유고슬라비아 의회의 권리당 소수 대표단에 속했다.
1927년 그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그의 분리주의 사상을 그에게 제시했다.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인의 역사적, 민족적 지역 전체를 포함하는 독립적인 대크로아티아를 제안했다. 1928년 중반, 크로아티아 블록의 지도자 트룸비치와 파벨리치는 자그레브에 있는 이탈리아 영사에게 알렉산더 왕의 정권에 맞서 크로아티아의 투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7월 14일, 그들은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고, 이후 파벨리치는 접촉을 유지했다.
그는 크로아티아 정치인들의 국민 의회 암살 사건을 목격한 후 농민-민주 연합에 가입하여 크로아티아 독립을 옹호하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치적 정당은 암살 이후 급진화되었다. 그는 브라니미르 옐리치가 이끄는 권리당의 청년 단체인 크로아티아 권리 공화주의 청년에서 지지를 얻었다. 1928년 10월 1일 그는 같은 이름의 무장 단체를 창설했는데, 이는 크로아티아인에게 반란을 공개적으로 촉구하는 행위였다. 유고슬라비아 당국은 이 조직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활동을 금지했다.
4. 우스타샤 창설과 망명 (1929-1941)
파벨리치와 우스타샤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았는데, 무솔리니는 이들을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무너뜨리고 아드리아해 지역에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다. 무솔리니는 파벨리치가 로마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유고슬라비아와 전쟁을 대비하여 파벨리치의 준군사 조직을 훈련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우스타샤의 훈련소는 이탈리아와 헝가리에 있었는데, 주로 이탈리아에서는 브레시아와 보르고발디타로에, 헝가리에는 너지커니저 인근의 연커푸스터(Janka Puszta)에 훈련소가 있었다. 1933년 우스타샤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려 하였다.[31][32] 이탈리아의 지원으로 무장한 우스타샤는 모터보트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유고슬라비아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우스타샤의 작전은 실패하였으나, 덕분에 알렉산다르 1세를 암살하기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34년 10월 9일에는 불가리아 출신의 혁명가였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가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 국왕, 프랑스의 루이 바르투 외무장관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했지만 현장에 있던 군중들과 프랑스 경찰들로부터 폭행당하면서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만다.
유고슬라비아의 군주는 지킬만한 무장력이 부족하였으며, 경계 태세도 느슨하여 파벨리치의 조직 능력이 진가를 드러내었다. 그는 분명 치안 당국의 고위 공무원에게 뇌물을 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르세유 치안 장관 주앙노(Jouhannaud)은 해임되었다.[33]
히틀러는 괴뢰 정권을 세워 나치에게 맡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별다른 선택이 없을 때에만 그런 조치를 취하였다. 크로아티아와 우스타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파벨리치는 우스타샤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우익당(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 정당)의 당수이자 젊은 변호사였다. 그가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기구(Ustasha-Hrvatska Revolucionarna Organizacija, UHRO)를 창설한 것은 1932년의 일이었다. 1932년 그는 크로아티아의 민족적 정체성과 가톨릭교회에 기반한 크로아티아 독립 국가의 청사진을 그리는 원칙 헌장을 썼다. 이 과업은 우스타샤의 지도 하에 크로아티아 인민을 규합한 무장 반란군의 몫이 될 것이었다. 인종 청소와 영토 획득은 우익당의 의제에서 핵심을 이루었다. 파벨리치는 새로운 크로아티아 국가는 보스니아 땅 대부분과 달마티아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고 믿었다. 파벨리치는 자신과 우익당이 이탈리아 파시즘 이념과 더 가깝다고 보았으나, 독일에서 우스타샤 운동은 점차 인종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들이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파벨리치를 권좌에 앉히는데 한 번 이상 고민하였다.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뒤 크로아티아의 수반직은 처음에 당시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체크가 제의받았다. 또 1941년 히틀러가 파벨리치를 대체할 것을 고려하면서 마체크에게 다시 수반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거부하였으며, 결국 파벨리치가 정권을 잡게 된다. 전쟁이 끝나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에서 도주했을 때 새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이 50,000명 이상의 크로아티아 병사를 살해하였다.[34]
5. 크로아티아 독립국 통치 (1941-1945)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후, 히틀러는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체크에게 정부 수반직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파벨리치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파벨리치는 가톨릭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약 24곳의 집중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중 야세노바츠 (Jasenovac)에서는 연합국 추산 750,000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가 살해당했다.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를 서방과 고트족의 세계에 가깝다고 여겼지만, 나치와 달리 가톨릭을 신봉하며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들을 3분의 1은 개종, 3분의 1은 학살, 3분의 1은 추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에 따라 75만 명 이상의 정교회 신자와 유태인, 집시 등이 우스타샤의 손에 학살당했다.[15]
1934년 10월 9일, 유고슬라비아 국왕 알렉산더 1세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루이 바르투가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불가리아 혁명가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였으며, 파벨리치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우스타샤는 알렉산더 국왕의 암살이 "유고슬라비아의 중추를 꺾었다"고 믿었으며, 이를 "가장 중요한 성과"로 여겼다.
1930년대 중반, 자그레브 거리에는 "안테 파벨리치 만세"를 의미하는 머리글자 "ŽAP"(Živio Ante Pavelić|지비오 안테 파벨리치hr)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벨리치는 나치 독일과 더욱 가까워졌고, 1936년 10월 독일 외무부를 위한 "크로아티아 문제"(Hrvatsko pitanje|흐르바츠코 피타녜hr; Die kroatische Frage|디 크로아티셰 프라게de)라는 설문 조사를 마쳤다. 이 설문 조사는 "세르비아 국가 당국, 국제 프리메이슨, 유대인 및 공산주의"를 적으로 간주했다.
1941년 4월 14일, 권력을 잡은 후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국가 재산 보존에 관한 법령'에 서명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 선포 전 두 달 동안 유대인이 행한 모든 대규모 재산 거래를 무효화했다. 그는 1941년 4월 17일 국가 및 국가 보호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 법령은 국가의 명예 또는 핵심 이익에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사형을 부과했다. 이 법은 세르비아인, 유대인 및 로마인을 법 밖으로 몰아내고 그들을 박해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월 19일과 22일에 우스타샤는 주 및 지방 정부, 국영 기업의 모든 직원을 정직시키는 법령을 발표했다. 1941년 4월 25일, 그는 키릴 문자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 법령은 세르비아 정교회 인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1년 4월 30일, 파벨리치는 '국적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모든 유대인을 비시민으로 만들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총리로서 파벨리치는 국가를 완전히 통제했다. 모든 정부 직원이 서약한 내용은 파벨리치가 국가의 주권을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칭호인 ''포글라브니크''는 크로아티아 국가와 우스타셰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냈다. 파벨리치는 국무 장관과 우스타셰 지도자를 임명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는 기능적인 입법부가 없었기 때문에 파벨리치는 모든 법률을 승인했고, 이는 그를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1941년 6월 9일, 파벨리치는 베르크호프에서 히틀러를 방문했다. 히틀러는 파벨리치에게 50년 동안 "국가적 불관용"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슬로베니아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세르비아인을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구역으로 추방하도록 권고했다. 1941년 7월, 독일 전권대사 에드문트 글라이제 폰 호르스테나우는 파벨리치를 만나 "우스타셰의 과도한 행동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공공 영역에서는 파벨리치를 중심으로 인격 숭배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 파벨리치는 1942년 1월 24일에 사보르를 소집했으나, 2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열린 회의는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1942년 12월 이후에는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1942년 3월 3일, 히틀러는 파벨리치에게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를 수여했다.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의 아들이자 세르비아인에 대한 우스타셰 집단 학살의 주요 주동자 중 한 명인 에우겐 디도 크바테르니크는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세르비아인에 대항하도록 지시하여 크로아티아 인구가 달마티아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영토 양보에 대한 반발을 막으려 했다고 말했다.
파벨리치는 세르비아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정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정교회 설립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는 세르비아인을 "정교회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겼던 안테 스타르체비치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강제적 및 자발적 개종을 통해 244,000명의 세르비아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42년 6월, 파벨리치는 로타 장군과 만나 우스타셰 행정부가 이탈리아 주둔지가 있는 도시를 제외하고 구역 3으로 반환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파벨리치는 이 구역에 체트니크 반공 자원 민병대의 지속적인 존재에 동의했고, 이탈리아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구역 3에 개입할 것이었다. 이 합의의 결과는 이탈리아군이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존재가 거의 없고 권위를 재부여할 수단이 없는 지역에서 대거 철수했다는 것이다. 이는 산자크에서 서부 보스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무인지대를 만들어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이 활동할 수 있게 했다.
파벨리치와 그의 정부는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선전이었지만, 많은 책은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문화가 번성할 수 있었다. 주요 문화적 이정표는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나중에 금지된 작품인 ''크로아티아 백과사전''의 출판이었다. 1941년 크로아티아 축구 협회는 FIFA에 가입했다.[5]
1942년 하반기에 베르마흐트 남동부 사령관 알렉산더 뢰르와 글라이제는 히틀러에게 파벨리치가 무능한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와 그의 아들 에우겐 "디도" 크바테르니크를 권력에서 해임하도록 촉구했다. 파벨리치가 1942년 9월 우크라이나에서 히틀러를 방문했을 때 그는 동의했다. 다음 달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는 슬로바키아로 은퇴할 수 있었고 에우겐은 그와 함께 갔다.
1944년 9월, 파벨리치는 히틀러와 마지막으로 만났다. 파벨리치는 독일이 체트니크 부대를 무장시키고 공급하는 것을 중단하고, 독일이 체트니크를 무장 해제하거나 크로아티아 독립국가 무장 해제하도록 허용할 것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체트니크를 신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고, 독일군에게 체트니크와의 협력을 중단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 당국을 지원하여 체트니크를 무장 해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 지휘관들에게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여지가 주어졌다.
5. 1.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립
히틀러는 괴뢰 정권을 세워 나치에게 맡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기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히틀러는 파벨리치를 권좌에 앉히는 데 고민하였다.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뒤 크로아티아의 수반직은 처음에 당시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체크에게 제의되었고, 1941년 히틀러가 파벨리치를 대체할 것을 고려하면서 마체크에게 다시 수반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거부하였으며, 결국 파벨리치가 정권을 잡게 된다.[34]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점령 후, 1941년 4월 10일,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zava Hrvatska)의 건국이 선언되었고, 파벨리치가 포글라브니크(국가 지도자 또는 총통으로 번역)가 되었다. 파벨리치는 아이모네 공작을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여 이탈리아 왕국과의 합병을 피하려 했다. 아이모네는 1941년 5월 18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국왕으로 공식 선포되었으며, 국왕의 이름은 토미슬라브 2세였고, 파벨리치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국왕의 권한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를 방문조차 하지 않고 로마의 사무실에서 국왕의 의무를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같은 해 4월 15일, 파벨리치는 자그레브에 도착했고, 다음날 16일, 조각에 착수하여 스스로 총리 겸 외무상이 되었다. 1941년 7월 10일, 파벨리치는 헝가리의 메지무르예 병합을 수용했다.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이 채택되어 모든 비아리아계 (크로아티아인은 아리아계로 간주) 시민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같은 날, 민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채택되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 조직, 문학 및 보도, 회화, 음악, 극장, 영화관에 비아리아인이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는 세르비아인의 집단 학살이 행해졌다.
5. 2. 포글라브니크로서의 통치
히틀러는 괴뢰 정권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크로아티아와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기구(UHRO)의 경우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에는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 파벨리치는 1932년 우스타샤를 창설하고, 크로아티아의 민족 정체성과 가톨릭교회에 기반한 독립 국가 청사진을 제시했다. 우스타샤는 인종 청소와 영토 획득을 핵심 의제로 삼았으며, 보스니아와 달마티아 전체를 포함하는 국가를 구상했다.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우스타샤는 점차 인종을 강조하게 되었다.[34]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후, 히틀러는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체크에게 수반직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파벨리치가 정권을 잡았다. 파벨리치는 가톨릭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약 24곳의 집중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중 야세노바츠 (Jasenovac)에서는 연합국 추산 750,000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가 살해당했다.[34]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를 서방과 고트 세계 쪽에 가깝다고 여겼지만, 나치와 달리 가톨릭을 신봉하며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들을 3분의 1은 개종, 3분의 1은 학살, 3분의 1은 추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계획에 따라 75만 명 이상의 정교회 신자와 유태인, 집시 등이 우스타샤의 손에 학살당했다.[15]
1934년 10월 9일, 유고슬라비아 국왕 알렉산더 1세와 프랑스 외무부 장관 루이 바르투가 마르세유에서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불가리아 혁명가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였으며, 파벨리치는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우스타샤는 알렉산더 국왕의 암살이 "유고슬라비아의 중추를 꺾었다"고 믿었으며, 이를 "가장 중요한 성과"로 여겼다.
1934년 10월, 파벨리치는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어 토리노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3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수감 기간 동안 유겐 디도 크바테르니크를 만나 암살은 "세르비아인들이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라고 말했다. 1930년대 중반, 자그레브 거리에는 "안테 파벨리치 만세"를 의미하는 머리글자 "ŽAP"(Živio Ante Pavelićhr)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벨리치는 이탈리아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나치 독일과 더욱 가까워졌고, 1936년 10월 독일 외무부를 위한 "크로아티아 문제"(Hrvatsko pitanjehr; )라는 설문 조사를 마쳤다. 이 설문 조사는 "세르비아 국가 당국, 국제 프리메이슨, 유대인 및 공산주의"를 적으로 간주했다.
1937년 4월 1일, 밀란 스토야디노비치-갈레아초 치아노 협정 이후, 모든 우스타샤 부대는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파벨리치는 시에나에서 가택 연금되었으며, 1939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반볼셰비키 작품인 "공포와 실수"(; )를 썼다.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유고슬라비아 공격을 준비한 후, 치아노는 파벨리치를 협상에 초대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의 무장 봉기, 이탈리아의 군사 개입,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통화 동맹, 관세 동맹, 개인 동군 연합을 갖춘 크로아티아 국가의 창설에 대해 논의했지만, 파벨리치는 나중에 이를 거부했다.
1940년 파벨리치는 이탈리아와 강한 유대 관계를 갖는 별도의 크로아티아 국가를 건설하는 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와 협상했지만, 이 계획은 프랑스 침공으로 연기되었고, 이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무산되었다.
파벨리치는 아이모네 공작을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임명하는 데 동의하여 이탈리아 왕국과의 합병을 피하려 했다. 아이모네는 1941년 5월 18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국왕으로 공식 선포되었으며, 국왕의 이름은 토미슬라브 2세였고, 파벨리치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국왕의 권한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를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1941년 7월 10일, 파벨리치는 헝가리의 메지무르예 병합을 수용했다.
1941년 4월 14일, 권력을 잡은 후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국가 재산 보존에 관한 법령'에 서명하여 NDH 선포 전 두 달 동안 유대인이 행한 모든 대규모 재산 거래를 무효화했다.
그는 1941년 4월 17일 국가 및 국가 보호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 법령은 NDH의 명예 또는 핵심 이익에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사형을 부과했다. 이 법은 NDH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및 로마족을 법 밖으로 몰아내고 그들을 박해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월 19일과 22일에 우스타샤는 주 및 지방 정부, 국영 기업의 모든 직원을 정직시키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정권은 모든 원치 않는 직원을 제거할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모든 유대인, 세르비아인 및 모든 유고슬라비아 지향 크로아티아인을 의미했다."
1941년 4월 25일, 그는 키릴 문자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에 서명했는데, 이 법령은 NDH의 세르비아 정교회 인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1년 4월 30일, 파벨리치는 '국적에 관한 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본질적으로 모든 유대인을 비시민으로 만들었다. 5월 23일부터 모든 유대인은 노란색 신분증을 착용해야 했으며, 6월 26일 파벨리치는 유대인이 NDH에 반하는 활동을 했다고 비난하고 그들의 강제 수용소 수용을 명령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NDH의 총리로서 파벨리치는 국가를 완전히 통제했다. 모든 정부 직원이 서약한 내용은 파벨리치가 NDH의 주권을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칭호인 ''포글라브니크''는 크로아티아 국가와 우스타셰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냈다. 파벨리치는 국무 장관과 우스타셰 지도자를 임명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NDH에는 기능적인 입법부가 없었기 때문에 파벨리치는 모든 법률을 승인했고, 이는 그를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파벨리치의 정권은 대중적인 HSS의 극우파를 통합함으로써 초기에 NDH의 대다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 직후, 파벨리치는 1941년 5월에 교황 비오 12세를 방문하여 바티칸의 승인을 얻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비록 교황청이 자그레브에 사절을 배치했지만). 바티칸은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와 관계를 유지했다.
1941년 6월 9일, 파벨리치는 베르크호프에서 히틀러를 방문했다. 히틀러는 파벨리치에게 50년 동안 "국가적 불관용"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히틀러는 또한 파벨리치에게 슬로베니아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세르비아인을 세르비아 군사령관 관할 구역으로 추방하도록 권고했다.
1941년 7월, NDH의 독일 전권대사인 에드문트 글라이제 폰 호르스테나우는 파벨리치를 만나 "우스타셰의 과도한 행동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1941년 말까지 대부분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우스타셰 정권을 받아들인 것은 실망과 불만으로 변했고, 정권이 자행한 테러의 결과로 친 유고슬라비아 정서가 친공산주의 감정과 함께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벨리치가 1941년 10월에 블라드코 마체크를 체포하여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로 보냈을 때 불만이 더욱 심화되었다.
공공 영역에서는 파벨리치를 중심으로 인격 숭배를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는 나치식 경례가 포함되었다. 파벨리치는 1942년 1월 24일에 사보르를 소집했다. 사보르는 2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열렸지만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1942년 12월 이후에는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1942년 3월 3일, 히틀러는 파벨리치에게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를 수여했다.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의 아들이자 세르비아인에 대한 우스타셰 집단 학살의 주요 주동자 중 한 명인 에우겐 디도 크바테르니크는 파벨리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세르비아인에 대항하도록 지시하여 크로아티아 인구가 달마티아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영토 양보에 대한 반발을 막으려 했다고 말했다. 소수 민족을 겨냥한 최악의 정책은 우스타셰가 운영하는 강제 수용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였다.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는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였다.
파벨리치는 세르비아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정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정교회 설립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는 세르비아인을 "정교회 크로아티아인"으로 여겼던 안테 스타르체비치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강제적 및 자발적 개종을 통해 244,000명의 세르비아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42년 6월, 파벨리치는 로타 장군과 만나 우스타셰 행정부가 이탈리아 주둔지가 있는 도시를 제외하고 구역 3으로 반환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파벨리치는 이 구역에 체트니크 반공 자원 민병대의 지속적인 존재에 동의했고, 이탈리아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구역 3에 개입할 것이었다. 이 합의의 결과는 이탈리아군이 NDH의 존재가 거의 없고 권위를 재부여할 수단이 없는 지역에서 대거 철수했다는 것이다. 이는 산자크에서 서부 보스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무인지대를 만들어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이 활동할 수 있게 했다. 1942년 중반까지 파벨리치의 정권은 NDH와 독일 주둔군이 강력한 자그레브 지역과 일부 대도시만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파벨리치의 충성 세력, 주로 우스타셰는 공산주의 지도 파르티잔과 싸우고 싶어했고,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유고슬라비아의 생각에 당황하여 그를 지지했다. 1941-42년에 크로아티아의 파르티잔 대다수는 세르비아인이었지만, 1943년 10월까지 다수는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요 크로아티아 농민당 회원인 보지다르 마고바츠가 1943년 6월에 파르티잔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것과 이탈리아의 항복 때문이었다.
파벨리치와 그의 정부는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선전이었지만, 많은 책은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문화가 번성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국립 극장은 많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들을 방문객으로 맞이했다. 주요 문화적 이정표는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나중에 금지된 작품인 ''크로아티아 백과사전''의 출판이었다. 1941년 크로아티아 축구 협회는 FIFA에 가입했다.[5]
1941년 12월 16일, 파벨리치는 베니스에서 이탈리아 외무부 장관 치아노를 만나 NDH에 12,000명 이하의 유대인이 남아 있다고 조언했다.
1942년 하반기에 베르마흐트 남동부 사령관 알렉산더 뢰르와 글라이제는 히틀러에게 파벨리치가 무능한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와 그의 아들 에우겐 "디도" 크바테르니크를 권력에서 해임하도록 촉구했다. 파벨리치가 1942년 9월 우크라이나에서 히틀러를 방문했을 때 그는 동의했다. 다음 달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는 슬로바키아로 은퇴할 수 있었고 에우겐은 그와 함께 갔다. 파벨리치는 1941-42년의 테러와 NDH 군대가 국가 내에서 법과 질서를 부과하지 못한 것에 대한 희생양으로 크바테르니크를 사용했다.
1943년 1월, 글라이제는 파벨리치에게 "NDH의 모든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고 수감자들을 독일로 보내 노동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뢰르는 또한 히틀러에게 파벨리치를 해임하고 우스타셰를 해산하고 글라이제를 NDH 영토에 대한 최고의 권한을 가진 전권 대사로 임명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3월까지 히틀러는 NDH를 진압하는 임무를 친위대 전국 지도자 (야전 원수) 하인리히 힘러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으며, 힘러는 자신의 전권 대사인 ''경찰 중장'' 콘스탄틴 카머호퍼를 임명했다. 카머호퍼는 제7 SS 의용 산악 사단 프린츠 오이겐을 NDH로 데려와 NDH 국토 방위군과 경찰에서 차출된 크로아티아인으로 보강된 6,000명의 ''폴크스도이체''를 핵심으로 하는 2만 명 규모의 독일 헌병대를 설립했다. 이 새로운 헌병대는 파벨리치가 아닌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탈리아 항복 직전, 파벨리치는 니콜라 만디치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임명했는데, 여기에는 미로슬라프 나브라틸이 군 장관으로 포함되었다. 나브라틸은 글라이제에 의해 제안되었고, 독일인들을 달래기 위해 파벨리치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 결과, NDH의 17만 명의 무장 세력이 독일 통제 하에 더 작은 부대로 재편성되어 이동성이 향상되었고, 우스타셰 민병대의 규모도 45,000명으로 증가했다.
1944년 9월, 파벨리치는 히틀러와 마지막으로 만났다. 파벨리치는 독일이 체트니크 부대를 무장시키고 공급하는 것을 중단하고, 독일이 체트니크를 무장 해제하거나 NDH가 무장 해제하도록 허용할 것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체트니크를 신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고, 독일군에게 체트니크와의 협력을 중단하고 NDH 당국을 지원하여 체트니크를 무장 해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 지휘관들에게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여지가 주어졌다.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점령 후, 1941년 4월 10일,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zava Hrvatska)의 건국이 선언되었고, 파벨리치가 포글라브니크(:en:Poglavnik 국가 지도자 또는 총통으로 번역)가 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국왕으로 이탈리아 왕족이 맞이되어 토미슬라브 2세 (재위: 1941년-1943년)로 즉위했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지위에 머물렀고 (국왕은 시종 이탈리아에 머물렀으며, 끝내 크로아티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포글라브니크인 파벨리치가 독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15일, 파벨리치는 자그레브에 도착했고, 다음날 16일, 조각에 착수하여, 스스로는 총리 겸 외상이 되었다.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이 채택되어 모든 비아리아계 (크로아티아인은 아리아계로 간주) 시민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같은 날, 민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채택되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 조직, 문학 및 보도, 회화, 음악, 극장, 영화관에 비아리아인이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는 세르비아인의 집단 학살이 행해졌다.
그 후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에 가입하여 6월 26일, 반공 동맹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14일, 일본이 영미와의 전쟁 상태에 들어가고, 독일이 그 뒤를 따른 것을 받아들여 마찬가지로 영미에 선전 포고했다. 1942년 9월, 파벨리치는 독일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를 얻어 국방상인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를 해임하고, 정부를 재편했다.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에 따라, 형식상의 국왕이었던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 때문에, 파벨리치는 포글라브니크의 칭호 아래 명실상부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5. 3. 대량 학살과 강제 수용소
안테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가 소비에트나 슬라브 세력권이 아닌 서방과 고트 세계 쪽에 가깝다고 여겼다. 우익당은 나중에 전쟁 중에 이러한 생각을 나치 독일과 가까이 하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독일과 여타 중부 유럽 강국의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탈주시키게끔 하지 못하게 가르친 나치와 달리, 파벨리치는 가톨릭을 신봉하며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들을 3분의 1 개종,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계획을 세웠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1/3을 전향할 것입니다. 우리는 1/3을 죽일 것이며 나머지 1/3은 자의건 타의건 떠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15] 그의 계획에 따라 크로아티아에서 75만 명 이상의 정교회 신자와 유태인, 집시 등이 우스타샤의 손에 학살당했다.[15]
독립 크로아티아국의 지도자였던 안테 파벨리치는 NDH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 범죄의 주요 선동자였으며,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반(反) 추축국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캠페인에 책임이 있었고, 여기에는 강제 수용소 네트워크가 포함되었다.[34] 뉘른베르크 재판의 수많은 증언과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쟁 기록 보관소의 기록은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증언한다.[4] NDH의 인종 정책은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의 세력을 키우고, 심지어 나치마저 파벨리치와 그의 대량 학살 캠페인을 억제하려 함에 따라 크로아티아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잃는 데 크게 기여했다.[3]
자국 정부에 의해 살해된 국가 인구의 비율로 볼 때, 파벨리치 정권은 스탈린의 소련, 히틀러의 독일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잔혹했으며, 유럽 외에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와 일부 아프리카 국가의 대량 학살만이 이를 능가했다. 대량 학살의 주요 선동자였던 파벨리치는 그의 측근인 유겐 디도 크바테르니크와 내무부 장관 안드리야 아르투코비치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계획과 조직을 담당했고, 브예코슬라프 루부리치는 명령을 실행했다.[6][7]
1941년 4월 말, 파벨리치는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알피오 루소와 인터뷰를 했다. 파벨리치는 세르비아 반군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에 루소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고 묻자, 파벨리치는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무렵 최초의 대규모 잔학 행위, 즉 루부리치의 직접 지휘 하에 우스타셰 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구도바츠 학살, 벨준 학살 및 글리나 학살이 발생했다.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니족 남성, 여성, 어린이가 칼로 살해되었다. 마을 전체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헛간으로 몰려들어 우스타셰가 불을 질렀다. 회당도 파괴되었는데, 특히 자그레브의 주요 회당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독립 크로아티아국에서는 우스타셰와 그 동맹국에 의해 172,000명에서 290,000명의 세르비아인, 40,000명의 유대인 중 31,000명, 25,000명에서 40,000명에 달하는 로마족이 살해되었다. 유대인과 집시 모두에 대해 말살 정책이 적용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크로아티아 유대인 30,000명 중 1,500명만이 살아남았다. 약 26,000명의 집시가 살해되었으며 약 40,000명의 주민이 살해되었다. NDH 정권에 의해 약 26,000명의 크로아티아 반파시스트(파르티잔, 정치적 반대자 및 민간인)가 살해되었으며, 여기에는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에서만 5,000~12,000명으로 추정되는 크로아티아 반파시스트와 기타 반체제 인사들이 포함된다.
이에 따라 약 24곳의 집중 수용소가 세워졌으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곳은 야세노바츠 (Jasenovac) 로, 연합국의 추산에 따르면 이 곳에서 750,000명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가 살해당했다.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이 채택되어 모든 비아리아계 (크로아티아인은 아리아계로 간주) 시민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같은 날, 민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채택되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 조직, 문학 및 보도, 회화, 음악, 극장, 영화관에 비아리아인이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는 세르비아인의 집단 학살이 행해졌다.
5. 4.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크로아티아 독립국 붕괴
1941년 3월 25일, 유고슬라비아는 삼국 동맹에 서명했지만, 이틀 후 다양한 요인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반대자들에 의한 피 없는 군사 쿠데타로 정부가 전복되었다.[1]
베오그라드 쿠데타 이틀 후, 무솔리니는 피렌체에서 파벨리치를 로마에 있는 자신의 개인 거주지인 토를로니아 빌라로 초대했다. 이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후 첫 만남이었다. 파벨리치와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 항복 이후 크로아티아의 입장에 대해 논의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달마티아에 대한 계획을 달성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이에 파벨리치는 이전에 맺은 합의를 인정하고 그를 안심시켰다. 파벨리치는 남은 억류된 우스타셰의 석방을 요청했고, 이탈리아 연락 장교가 그에게 배정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또한 그가 늦은 저녁 방송을 할 수 있도록 피렌체에 라디오 방송국을 빌려주었다. 1941년 4월 1일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해방을 외쳤다.[5]
1941년 4월 6일 추축국은 여러 방향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준비가 부족한 유고슬라비아 왕립군을 빠르게 압도했고, 11일 후에 항복했다.[6] 독일의 작전 계획에는 내부 불화를 증가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인에게 정치적 약속'을 하는 것이 포함되었다.[2]
독일은 일반적으로 기꺼이 협력하려는 비파시스트와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최후의 수단으로만 완전한 파시스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2] 크로아티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치는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가 대중의 지지를 받아 최소한의 병력으로 점령 구역을 통제하고 가용 자원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를 원했다. 바노비나 크로아티아의 행정은 블라드코 마체크의 HSS와 대부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 독립 민주당의 동맹의 통제를 받았다. 마체크는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츠베트코비치 정부의 부총리였으며, 추축국 가입 지지자였으며, HSS 크로아티아 농민 방위군의 형태로 즉석에서 사용할 수 있는 준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독일은 마체크에게 "독립 크로아티아 국가"를 선포하고 정부를 구성하도록 시도했다. 그가 협조를 거부하자 독일은 우스타셰가 독일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치할 수 있다는 보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리치를 지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결정했다.
독일은 파벨리치가 침공 당시 유고슬라비아에 약 900명의 맹세한 우스타셰를 거느리고 있었고, 우스타셰 자체는 지지자가 약 40,000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또한 파벨리치를 이탈리아 첩자 또는 "무솔리니의 사람"으로 간주했지만, 부지도자(Doglavnik|links=nohr)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와 같은 다른 선배 우스타셰가 파벨리치가 이끄는 모든 정권에 의해 그들의 이익이 보장될 만큼 친독일적이라고 생각했다.
1941년 4월 10일, 크바테르니크는 자그레브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포글라브니크'' 안테 파벨리치의 이름으로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선포했다. 이 선포는 특히 자그레브, 서부 헤르체고비나 및 리카에 거주하는 인구의 상당 부분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스타셰에 잠입한 크로아티아 농민 방위군은 유고슬라비아 왕립군 부대를 무장 해제하고 일부 통제를 가함으로써 지원했다. 그러나 우스타셰는 일반 크로아티아인으로부터 제한적인 지원을 받았다.[3] NDH의 독일군 사령관은 국가 인구의 약 2%만이 우스타셰 정권을 지지한다고 추산했다.
이탈리아에 억류되었던 우스타셰는 피렌체에서 약 50km 떨어진 피스토이아에 집중되었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군복과 소형 무기를 받았다. 그들은 4월 10일 파벨리치와 합류하여 NDH 선포를 알리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파벨리치의 피스토이아 방문은 실제로 마르세유 암살 사건 이후 우스타셰와의 첫 만남이었다. 피스토이아에서 파벨리치는 독립 크로아티아를 위한 그들의 투쟁이 거의 끝나간다고 선언하는 연설을 했다. 그 후 그는 피렌체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비엔나에서 방송된 라디오 방송에서 크바테르니크의 선포를 들었다. 4월 11일, 파벨리치는 로마로 가서 안푸소의 환대를 받은 후 무솔리니를 접견했다. 회의 동안 파벨리치는 자그레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정부가 즉시 인정받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
로마 회의 후, 파벨리치는 우스타셰 호위병과 함께 기차에 올라 트리에스테와 리에카를 거쳐 자그레브로 갔다. 그는 4월 13일 약 250~400명의 우스타셰와 함께 카를로바츠에 도착했고, 독일 외무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국가 창설을 감독하기 위해 임명한 베제마이어의 환영을 받았다. 카를로바츠에서 파벨리치는 이탈리아에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무솔리니의 특사가 그곳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협상이 이루어져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보낸 그의 메시지가 달마티아 문제와 추축국의 인정을 만족스럽게 처리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NDH에 대한 이탈리아-독일의 긴장의 첫 징후였다.
1941년 4월 16일, 파벨리치는 새로운 크로아티아 독립국 정부를 임명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그는 처음으로 선서를 했고, 그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1102년부터 [크로아티아] 국민은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서...839년이 지난 지금, 책임 있는 크로아티아 정부를 구성할 시간이 왔다.
따라서 파벨리치는 NDH를 "크로아티아 국민의 역사적 열망"의 구현으로 제시했다. 법령은 오스만 쿨레노비치를 정부 부통령으로,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를 파벨리치의 부통령으로 임명하고, 다른 8명의 선배 우스타셰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우스타셰는 정화되고 "우스타화"된 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기존 관료 기구를 사용했다. 새로운 정권은 크로아티아인들이 현대의 고향에 도착한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 온 크로아티아 국가의 개념을 이용했고,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가톨릭 성직 권위주의 및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농민주의가 혼합된 극단적인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반영했다.
1941년 12월 25일, 수백 명의 시민, 우스타셰 운동의 회원 및 ''도모브란스트보''(육군)가 항의했다. 파벨리치는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구실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실제 감정과 국민들의 감정을 이탈리아인에게서 숨겼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몰락 이후, 토미슬라브 2세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명령에 따라 크로아티아 국왕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왕이 공식적으로 물러나자 파벨리치는 '포글라브니크'라는 칭호로 NDH의 국가 원수 직을 맡았고, 니콜라 만디치를 새로운 총리로 임명했다. 이탈리아는 이후 아치제 작전으로 독일에 침공당하고 점령당했다.
이탈리아가 1943년 9월 항복하자마자, 파벨리치는 이탈리아가 합병했던 달마티아를 NDH에 신속하게 통합하고 반군에 가담했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사면을 제안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전에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지역, 즉 광산과 주요 농업 지역을 자체적으로 점령했다.[7] 1943년 11월까지 파벨리치와 그의 정권은 NDH 영토의 일부만 통제했고, 1944년 3월에는 ''SS-여단지도자이자 무장 친위대 소장''(SS-Brigadeführer und Generalmajor der Waffen-SS) 에른스트 피크가 "권력 면에서 안테 파벨리치 박사는 자그레브 시의 시장일 뿐이며, 교외는 제외한다"라고 언급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1944년의 로르코비치-보키치 쿠데타였다. 믈라덴 로르코비치 장관과 안테 보키치 장교는 크로아티아가 전쟁에서 입장을 바꾸고 파벨리치는 더 이상 국가 원수가 아니어야 한다는 계획을 제안했는데, 이는 영국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파벨리치가 그들의 아이디어를 지지했지만, 지역 게슈타포 장교의 방문을 받은 후 마음을 바꿨다.
파벨리치는 쿠데타에 연루된 로르코비치와 보키치를 비롯해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일부 대표들과 다수의 '도모브란' 장교)를 체포했다. 로르코비치와 보키치는 1945년 4월 말 레포글라바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영미" 쿠데타 계획이 발각된 후, 1944년 9월부터 1945년 2월까지 파벨리치는 소련과 협상했다. 소련은 붉은 군대의 자유로운 접근과 공산주의자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크로아티아 국가를 인정하기로 동의했다. 파벨리치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치 독일과 동맹을 유지했다.
독일의 붕괴를 목격하고 크로아티아군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파벨리치는 자신의 병력을 오스트리아로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수만 명의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들이 명확한 전략 없이 북쪽으로 대규모 행진을 시작하게 만들었다.[8] 파벨리치는 1945년 5월 6일에 국외로 탈출했고, 5월 8일에는 로가슈카 슬라티나에서 NDH 정부의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다.[9] 이 회의에서 알렉산더 뢰르 장군은 독일의 항복을 정부에 알리고 NDH 군대의 지휘권을 파벨리치에게 넘겼다.[9] 파벨리치는 이후 브예코슬라브 루부리치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날 늦게 파벨리치의 호송대는 오스트리아의 소련 점령 지역으로 들어갔고, NDH 정부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영국 점령 지역으로 갔다. 그들은 미국의 점령 지역으로 이동했고, 5월 18일까지 1944년 12월 NDH를 떠난 후 파벨리치의 아내 마라와 두 딸이 살고 있던 라트슈타트 근처의 라인그라이스 마을에 도착했다.
5월 8일, 파벨리치는 NDH에서 온 대열에게 오스트리아로 계속 이동하여 진격하는 유고슬라비아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영국군에게 항복할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5월 중순 블라이부르크 송환에서 되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후 유고슬라비아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은 후퇴를 늦추었고, 연합국에게 항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스타셰의 인간 방패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낳게 했다.[8]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을 버린 것에 대해, 나중에 크로아티아 이민자들은 파벨리치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NDH 정부의 여러 구성원은 6월 6일 밀레 부닥 재판 후 자그레브에서 하루 동안의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 직후 파벨리치는 잘츠부르크에 더 가까운 티프브루나우 마을로 이주했다. 9월, 미국의 관리들은 그 가족이 난민이라고 믿고 그들의 신원을 알지 못한 채 장크트길겐 마을로 이주하도록 했다. 장크트길겐 이후 파벨리치는 전쟁 전 마케도니아 혁명가의 가족과 함께 몇 주 동안 머물다가 오버트룸에 정착했다. 파벨리치는 1946년 4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6. 전후 도피 생활과 죽음 (1945-1959)
파벨리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의 체포를 피해 바티칸이 마련해준 도주로, 일명 쥐구멍 라인을 타고 남미로 도망쳤다.[15] 독일의 붕괴와 크로아티아군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은 파벨리치는 자신의 병력을 오스트리아로 이동시켰고, 수만 명의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들이 북쪽으로 대규모 행진을 시작했다.[8] 1945년 5월 6일 국외로 탈출했고, 5월 8일 로가슈카 슬라티나에서 NDH 정부의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다.[9] 파벨리치는 브예코슬라브 루부리치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날 늦게 파벨리치의 호송대는 오스트리아의 소련 점령 지역으로 들어갔고, NDH 정부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영국 점령 지역으로 갔다.
5월 8일, 파벨리치는 NDH에서 온 대열에게 오스트리아로 계속 이동하여 영국군에게 항복할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5월 중순 블라이부르크 송환에서 되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유고슬라비아군에 의해 살해되었다.[8]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을 버린 것에 대해, 크로아티아 이민자들은 파벨리치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NDH 정부의 여러 구성원은 1945년 6월 6일 밀레 부닥 재판 후 자그레브에서 처형되었다. 파벨리치는 잘츠부르크 근처의 티프브루나우 마을로 이주했다. 9월, 미국의 관리들은 그 가족이 난민이라고 믿고 장크트길겐 마을로 이주하도록 했다. 이후 파벨리치는 오버트룸에 정착, 1946년 4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46년 봄, 그는 페루 여권을 소지한 사제 모습으로 이탈리아에 입국, 베네치아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 가톨릭 사제 복장으로 도착, 돈 페드로 고너라는 가명을 사용했다.[15] 로마에 도착한 그는 바티칸의 보호를 받았고 로마에 있는 동안 바티칸 소유의 여러 거처에 머물면서 측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파벨리치는 로브로 수시치, 마테 프르코비치, 보지다르 카브란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국가 위원회(Hrvatski državni odborhr)를 결성했다.
티토와 그의 공산주의 정부는 파벨리치를 숨겨준 혐의로 가톨릭 교회를 비난했다. 유고슬라비아 언론은 파벨리치가 교황의 카스텔 간돌포 여름 별장에 머물렀다고 주장했으며, CIA 정보에 따르면 그는 1948년 여름과 가을에 교황 관저 근처의 수도원에 머물렀다.[15]
파벨리치는 나폴리 근처의 예수회 집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 가을, 그는 로마 가톨릭 사제인 크루노슬라프 드라가노비치를 만나 헝가리 이름 ''팔 아라뇨스''로 적힌 적십자 여권을 얻는 데 도움을 받았다. 미국은 파벨리치의 소재를 알았더라도 그를 유고슬라비아로 인도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10]
1948년 11월 6일, 파벨리치는 이탈리아 상선 ''세스트리에레''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여 전직 우스타샤이자 작가인 빈코 니콜리치와 함께 살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벨리치는 그의 아들 벨리미르와 딸 미르야나와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 마리아와 큰딸 비슈냐도 도착했다.
파벨리치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안보 고문으로 취직했다. 파벨리치의 입국 서류에는 ''파블로 아란호스''라는 가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1950년 파벨리치는 사면을 받아 다른 34,000명의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머무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 후 파벨리치는 이전 가명인 ''안토니오 세르다르''로 돌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계속 살았다.
아르헨티나에서 파벨리치는 벽돌공으로 일해야 했다. 페론 부부와의 가장 좋은 인맥은 또 다른 전직 우스타샤인 브란코 벤존이었는데, 그는 대통령의 아내 에비타 페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벤존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잠시 크로아티아 주 독일 대사를 지냈고 히틀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는 크로아티아-독일 관계에 도움이 되었다. 에비타 페론과의 벤존의 친분 덕분에 파벨리치는 영향력 있는 건설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우스타샤 관련 단체인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Croatian Home Guard)에 가입했다.
1940년대 말, 많은 전직 우스타샤는 파벨리치로부터 갈라졌다. 파벨리치로부터 갈라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우스타샤라고 칭하며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부활을 추구했다. 이 분리주의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전직 우스타샤 장교이자 NDH 강제 수용소 책임자인 브예코슬라브 루부리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을 이용하여 크로아티아 정치 이민자들을 모았다. 파벨리치는 이 조직의 활동을 확장하려고 노력했으며, 1950년에는 크로아티아 국가 정당을 창설했지만 그해에 해산되었다.
1951년 4월 10일, 크로아티아 독립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국가 정부를 선포했다. 이 새로운 정부는 스스로를 망명 정부로 간주했다. 파벨리치 자신도 정치적으로 활동하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공산주의 정권이 세르비아 헤게모니를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성명, 기사 및 연설을 발표했다.
1954년 파벨리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던 전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인 밀란 스토야디노비치를 만났다. 그들의 회담 주제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역사적인 화해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1956년 6월 8일, 파벨리치와 다른 우스타샤 이민자들은 나치즘과 NDH를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 (HOP)을 설립했다.
1957년 4월 10일, 크로아티아 독립국 건국 16주년에, 파벨리치는 세르비아인 블라고예 요보비치의 암살 시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요보비치는 호텔 소유주이자 전 유고슬라비아 왕국 장교로, 전쟁 중 몬테네그로 체트니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요보비치는 파벨리치가 자택 근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인 엘 팔로마르에서 버스에서 내리던 중 등과 쇄골에 총을 쐈다. 파벨리치는 시리아-레바논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진정한 신원이 밝혀졌다. 자유 혁명 이후, 파벨리치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호의를 잃었고, 유고슬라비아는 다시 그의 인도를 요청했다. 파벨리치는 척추에 총알이 박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총격 2주 후, 아르헨티나 당국이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인도 요청을 수락하기로 동의하자 그는 칠레로 이주했다. 그는 산티아고에서 4개월을 보낸 후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파벨리치는 1957년 11월 29일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그는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의 회원들과 계속 접촉했으며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을 맞이했다. 파벨리치는 가족과 함께 비밀리에 살았으며, 이는 아마도 스페인 당국과의 합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망명을 허가받았지만, 스페인 당국은 그의 공개적인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1958년 중반, 그는 마드리드에서 뮌헨에 있는 크로아티아 협회 총회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모든 크로아티아인이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재건하는 목표로 단결하기를 희망했다. 유언장에서 그는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의 회장으로 지명했다. 파벨리치는 1959년 12월 28일, 마드리드의 알레만 병원에서 요보비치의 암살 시도로 입은 상처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 묘지인 산 이시드로 묘지에 묻혔다.
7. 유산과 논란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 소설 《아버지의 조국을 위하여》는 대체 역사를 배경으로 하며,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1979년까지 존속한다. 파벨리치는 초대 ''포글라브니크''로 숭배받으며 그의 초상은 국가의 주요 통화에 등장하지만, 1943년 2월에 현실과 갈라진 그 타임라인에서 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공유되지 않는다.
2015년 크로아티아 코미디 영화 《국민 영웅 릴리 비디치》에서 파벨리치는 Dražen Čuček|드라젠 추체크hr가 연기했다. 이 영화는 젊은 시인 릴리 비디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그룹이 히틀러를 위한 파벨리치의 환영회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기 위해 NDH의 가상의 탤런트 쇼 "Factor X"에서 경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르티잔은 히틀러와 파벨리치를 모두 죽여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낼 기회로 본다.[12] 2017년에는 이 영화가 연극으로 각색되었으며, 파벨리치는 보리스 미르코비치가 연기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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